[최낙권] 맹이떡에 관한 진실

맹이떡에 관한 진실

 

 

최낙권(영화감독, 리얼곤시네마 대표)

 

맹이떡, 오매떡, 유동떡, 삽실떡, 머구떡, 구름들떡…. 어릴 적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에는 그런 ‘떡’을 지닌 어머니 할머니들이 30여 명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을 따 맹이양반, 오매양반, 삽실양반, 머구양반 등 누군가의 아버지 할아버지들도 살고 있었다. 아무 물정 모르던 때에는 ‘떡’이라는 호칭이 왜 하필 ‘떡’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에 눈을 뜨고 나서야 어머니 할머니들이 나고 자란 친정 고향의 지명을 따서 가가호호 ‘택호’를 그렇게 지어 부른 것임을 알게 되었고, ‘떡’이란 ‘댁’을 일컫는 전라도 산골 사투리인 것도 알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남원군 사매면 출신인 우리 어머니는 ‘사매떡’이라는 고상한 이름을 놔두고 왜 하필 이름도 뜻도 모를 ‘맹이떡’이란 촌스럽고 천덕꾸러기 같은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괜히 알았다가 마음 다칠까 봐 그 궁금증을 드러내기 주저스러웠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비록 남존여비의 세속이었음에도 그런 식의 호칭으로나마 모계 존엄에 대한 배려를 뿌리로 내려받고 있었을 것’이라는 세평 정도는 주절거릴 수 있게 되었지만, 내게 있어 우리 어머니는 그저 ‘맹이떡’이었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맹이떡’일뿐이었다.

1996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지 몇 년 후 최명희 님의 ‘혼불’을 접하기 전까지 그러했다. 섬섬옥수 1만 2천 매의 원고를 채워가며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에도 애통을 하였다는 작가로서의 존엄을 뒤로하고, 쌀알 한 톨 한 톨 각기 따로 밥을 지어 고봉밥을 담아내는 듯한 신묘의 문장들을 뒤로하고,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소설 속 씨 종자들이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혼불의 주 무대가 된 남원시 사매면 ‘매안골’과 ‘매안 이씨 여인 3대’ ‘일제 강점기’ 등의 설정 배경들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니 매안 이씨하고는 거리가 멀 터, 그럼에도 우리 어머니가 ‘맹이떡’으로 불린 퍼즐을 맞춰볼 기회가 포착되었었다.

반가움에 지역 정보를 뒤져보니, 혼불에 그려지고 있는 ‘매안골’은 사매면 일대를 일컫는 옛말이었고,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어머니 고향인 사매면 대신리 상신부락이 과거 매화꽃이 내려앉는 자리라 하여 ‘매안(梅岸)골’ 혹은 ‘매안방(坊)’이라 불려왔고 속칭 ‘여의(如意)터’라 불리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매안댁’으로 불려야 했을 택호가 ‘매안떡’이 되고, ‘매안떡’이 ‘매안이떡’이 되었다가, 밤이나 낮이나 흙바람 되로 마셔가며 살던 향토 아낙들 콧속으로 입속으로 들락거리던 ‘매안이떡’이 언제부턴가 숨쉬기 편한 ‘맹이떡’이 되었을 거라는 퍼즐을 맞춰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1919년 남원지역 독립 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옥살이까지 하시던 외할아버지의 큰 따님이 천덕꾸러기 같은 ‘맹이떡’이라는 택호를 가질 리 없었다고 안도했다. 그 후 최근에 와서는 그동안 휘발되고 남은 게 없을 것 같은 또 다른 궁금증 하나가 스며들어 왔다. 그런데 왜 우리 어머니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친정 이야기나 외조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1990년에 이르러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실 만큼 자랑스러운 외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나는 1890년에 나서 1978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서너 번 뵌 기억밖에 없다. 아마도 외할아버지 칠순 때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때인 1960년에서 1970년 어디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1960년 내 나이 대여섯 살에 어머니를 따라 매안의 외갓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우리 외갓집은 왜 이렇게 작아?’라고 느꼈던 기억, 그렇지만 도깨비 뿔 같은 정자관 아래 유난히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니가 아무개냐?’ ‘오느라 고생했다. 아나, 이리 와, 사탕 하나 먹어라.’고 위엄을 뽐내며 말씀하시던 외할아버지 모습은 밤하늘 은하수를 보던 기억만큼 선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 ‘맹이떡’이 자식들에게 외갓집과 외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1918년 7월 3일(음)생 ‘맹이떡’은 벌써 첫돌도 맞기 전 외할머니 등에 업혀 남원주재소로 전주감옥으로 경성감옥으로 외할아버지 형제분 면회를 다녔을 것이다.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되었지만, 형제분이 나란히 투옥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을 테고, 2년여의 옥고를 치르신 후에도 해방이 되기까지 남원지역 종친 유지들과 함께 39인 영춘계(迎春稧-봄을 맞이하는 볏단이라는 의미로 해석)라는 걸 결성해 지하운동을 벌이며 수시로 주재소에 불려 다니셨다 하니, 그렇게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사시는 외할아버지 형제분, 특히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몇 년 만에 세상을 뜨신 작은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모름지기 ‘맹이떡’은 허물어지고 짓물러져 가는 가문의 상처를 뼛속으로 깊고 깊게 그려 넣었을 것이다.

그러니, 세종대왕 17번째 왕자인 영해군(寧海君)파 왕손 가문이라는 이름 하나 겨우 붙들고서 나이 열아홉에 인근 산서면의 백섬지기 최씨에게 시집을 온 ‘맹이떡’이야말로 혼불에서 천석지기 청암댁 종부로 시집온 율촌댁 신세와 다를 바 없었을 터였다. 그저 삼종지도라는 율법에 따라 입 닫고 귀 닫고 눈도 닫고 살기를 작정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해방을 맞고 나라가 독립을 하였음에도 전쟁에 혁명에 ‘불령선인’과 다를 바 없는 반체제자 배척의 시대가 1980년대까지 이어졌으니, 행여 자식들에게 그 그림자가 드리워질까 봐 어디 친정 이야기를 입 밖에 낼 수 있었을 것이며, 하물며 독립운동을 하시다 그리되었노라는 친정아버지 형제분 이야기인들 어디 대고 말할 수 있었으랴 싶다. 아마 ‘맹이떡’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소릴랑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친정 식구들을 단속해왔는지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런 사실을 멀리했을 리가 없었을 거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맹이떡’은 가끔 시어머니 알게 모르게 따로 챙겨둔 보따리를 이고 30리 밤길 너머에 계시는 노령의 친정아버지를 찾아 가 이밥을 짓고 묵은 빨래를 해 드린 다음 이내 그 길로 돌아와 여념 없이 우리의 아침밥을 지어 먹이곤 했다는 말을 훗날 누이들한테 듣고는 울컥 목이 멨던 적이 있다. 보절면을 지나고 덕과면을 지나 사매면까지 12km 칠흑의 밤길, 과거 태극기를 실어날랐을지도 모를 그 길들은 ‘맹이떡’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결국, 우리의 ‘맹이떡’은 이렇다 할 말씀 없이 일흔아홉 성상을 숨죽여 사시다 가시었다. 혼불의 율촌댁처럼 시어머니에게 빼앗긴 제 자식의 정을 되찾지 못하고 존재감 없이 그 자식 때문에 애만 끓이다 가시었다. 가시기 전 10여 년 동안 원불교 법회를 드문드문 다니셨는데, 일원상(一圓相)의 의미를 찾고자 함이셨을지, 아니면 자성불(自性佛)의 깨우침을 얻고자 함이셨을지, 나는 생전에 우리 어머니 ‘맹이떡’에게 그 물음조차 갖지 못하였다. 나는 혼불의 ‘강모’(율촌댁의 아들이기 전에 청암댁의 손자)였고, 혼불의 강모처럼 심심파적으로 세상을 떠돌았기 때문이다.

 

 

 

비로소 2021년 11월 11일,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에서 우리 ‘맹이떡’의 아버지 형제분을 기리는 ‘이성기, 용기 형제와 남원 3.1 독립 만세 의거’라는 책을 출간해 이를 헌정하는 의식이 남원에서 행해졌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자랑이 된 독립운동 가문의 역사를 뒤로하고, 1919년 4월 3일, 식수일을 핑계 삼아 우리 외할아버지 형제분 외에도 1000여 명의 군중이 합세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하는데, 그중 이름도 없이 모였던 분들의 형편은 어땠는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음이 오며 가며 아쉬움으로 남아돌았다. 그들 모두의 덕분에 외할아버지 형제분도 오늘의 우리에게 자랑으로 남아 계실 텐데 말이다.

 

 

1930년대 혼불의 강모처럼, 1980년 5월, 의식의 혼돈 속을 떠돌다 부나방처럼 서울역 10만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던 그때의 나처럼, 2016년 겨울, 이름 없이 100만 개 중의 하나가 되었던 내 촛불처럼, 혹은 우리 어머니 ‘맹이떡’처럼 기억되지 않은 그들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역사가 반드시 있을 터, 혼불을 쓰게 된 최명희 님의 작품 의도를 대신 빌려와 본다. ‘나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 조상들은 무엇을 먹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에 대한 궁금증의 해결 과정이 혼불의 의미이다.’ 이제는 자랑이 된 우리 외할아버지 형제분뿐 아니라 우리 어머니 ‘맹이떡’처럼 이름도 없이 죄인으로 살다 가셨을 그 모든 분에게 잠시 사죄의 묵례라도 올리고 싶은 그런 밤이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살아있는 이들이 고인들을 기억하지 않을 때 그들은 진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영화 ‘코코(2017, 미국)’의 이야기가 홀연히 겹쳐 지나간다. 혼불처럼…….

추서: 소중한 지면에 개인의 가정사를 올리게 된 점 송구하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2021.12.05. 최낙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