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우] 신년 맞이 가족회의

신년 맞이 가족회의

 

이바우(전북대 대학원 고고문화인류학과)

 

 

“가족회의 하자.”

한 해의 마지막 날이나 새해 첫날에는 다섯 식구 모임이 소집되었다. 막내인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결혼 전까지. 거의 매해 그랬다.

구십일 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님은 옹기를 배워 업으로 삼으셨고, 이십 년 뒤 삼남매가 성인이 되고부터 우리 가족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같이 일했다. 중학교 땐 그랬다. 가족회의라는 게 옹기일 또는 가족공동체 운영에 대한 안건-의견-결론이 있는 논의의 장이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개 아빠의 새해 결심이 발표되거나 아빠, 엄마의 관계 재정립을 위한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세 자녀는 몇 가지 안건을 듣고서 자기 생각을 말하거나 침묵하였다. 부모의 발언은 가족구성원으로서 자녀들 의견을 묻는 형식이었으나, 그 내용은 자녀들에게 통보처럼 느껴졌다. 해마다 예상되는 카테고리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 아빠가 이제 헤어지려고 해. 너희들 의견을 묻고 싶어. 아빠는 앞으로 혼자 일하고 싶고, 엄마도 엄마 일을 하면 좋겠어.”

“부산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아빠가 장계에 살면서 옹기를 하고 싶대. 엄마는 따로 일하든, 하고 싶은 거 하라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는 거실 방바닥에 빙 둘러앉아, 매끈한 하늘색 장판에 그려진 무늬나 앞앞에 놓인 찻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말해야 하나. 아직 다 함께 일하지 않던 시절에는 내 것 같은 고민이 없었다. 옹기는 그들의 일이었으니까. 부모님이 힘든 일을 다른 가닥으로 풀어보려 할 때마다 어찌 되든 잘 될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관계에 대한 안건에선 셋의 반응이 달랐다. 네 살 많은 오빠는 또박또박 정확하게, 이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오빠와 같은 마음이었다. 한참 망설이다 짧게 말을 꺼내거나 조용히 고갤 숙였다. 회의 때마다 울보였던 나는 줄줄 눈물이 흐르는 걸 손등으로 닦아내느라 바빴다. 가족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내게도 별 의미 없었다. 그런데 고1인가, 고2가 되던 해였나, 언젠가는 눈물을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엄마, 아빠가 헤어지시면 좋겠어요. 그게 훨씬 행복하실 것 같아요.”

새해 안건은 연말이나 새해에만 문제되는 게 아니었고 그들 평생의 고질적인 질문이었으며 언젠간 선택이 필요한 갈등 요소였다. 매년, 매번, 말만 하지 말고 제발 힘들게 살지 않길. 이번에야말로 두 분이 실천하셨으면. 자녀의 동의가 필요하다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우리 의견을 물은 뒤 다시 지루하고 괴로운 충돌의 해를 보냈다.

그들 사이와 관계없는 마음이 되자 가족 일원으로 사는 게 조금 수월해졌다.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눈앞에 어떤 광경이 벌어져도 그 자리에 없는 듯 투명한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어느 해 명절, 부산에서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댁으로 돌아가시던 날 깨달았다. 달걀 세 판과 장수사과 한 박스가 마당에 내동댕이쳐지고, 큰 소리로 실랑이하던 구십대 할아버지는 팔십대 할머니를 휠체어에서 부축해 차에 태우고, 큰아빤 얼른 시동을 걸고 조수석에 앉은 큰엄만 울고, 뒷자리에 탄 친척 동생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던 순간. 고동색 산타페가 출발하면서 남긴 흙먼지 뒤로 우리는 헛웃음 지으며 깨진 달걀과 사과를 치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가 그리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괜찮아진 것은 맞았다. 차가 떠난 뒤 아빠는 작업장에 들어갔다. 엄마는 재빨리 싸리비를 들고 와 마당을 쓸었다. 오빠는 컴퓨터 하러 방에 들어갔고 언니는 나뒹구는 사과를 주웠다. 나는 흙 묻은 사과 몇 알을 장독대에 올려두고 휴대폰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산책했다. 저녁밥상에 다시 모인 우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세 자녀는 어릴 적부터 다짐했다. 부부 간의 동업을 하지 않겠노라고. 오빠는 사서 고생하지 않겠단 이유로 비혼이 되었고 언니는 고생을 사서라도 감정에 성실했다. 나는 모르겠다. 나는 어땠나. 부모님이 왜 같이 일하는지, 굳이 함께 사는지, 옹기일과 자녀들을 핑계 삼아서까지 헤어지지 않는지 알고 싶었다. 오빠와 언니가 전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고 중학생인 나와 부모님, 세 식구가 손내에 살던 때가 있었다. 내가 열다섯, 부모님은 사십대 중반이었다. 나는 이현배와 최봉희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오직 ‘우리의 부모’인 두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어릴 적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어려운 시대와, 그 시절을 통과한 이십대, 두 사람의 만남과 결혼 뒤의 날들에 대해, 그들이 선택한 옹기일, 드문 기쁨과, 잦은 힘듦, 지리멸렬함, 그리고 서로에 대해. 나는 그저 들었다. 실은 외면하고 싶었다. 이해하고 받아들여 잊기를 원했다.

그 시간동안 그들을 마음으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두 사람의 다름에 대해 조금 알게 됐던 것 같다. 엄마는 행복하게 살고 싶고, 아빠는 의미 있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 엄마는 아랫마당 커다란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이 아름답다 하고, 아빠는 그 가지가 드리운 땅의 밤그늘을 더 좋아한다는 것. 이런 차이만으로도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싶은 관계. 그렇지만, 그럼에도, 함께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뿌리 깊은, 설명되고 묘사되기 어려운 관계가 있다는 것.

나도 부모님과 같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만큼은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는지. 주말이면 아일 데리고 본가에 가서 부모님을 본다. 올해 쉰아홉이 된 두 사람. 일이 고되어 바람 잘 날 없지만 수도(修道)하는 마음으로 가족의 길을 간다. 괜찮을 것을, 더 나아질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족의 해체를 바라지 않았던 언니, 오빠는 부모님에게 옹기 만드는 일을 배운다. 이제 보니 가족의 해체는 옹기일의 단절이었다. 부부 간 동업이 세대 간 동업이 되고, 옹기일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주 안건이 된 지금. 이제는 돌아오는 다른 질문에 긴장해야 한다.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니?”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