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현] (사랑) 안 해!

(사랑) 안 해!

 

박시현(외국어대 명예교수)

 

 

손주를 차에 태우고 제법 먼 길을 운전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린이 집에서 오전을 보내고 점심까지 먹고 하원했기 때문에 약간 졸리는 눈치여서 손주가 좋아하는 노래를 한 두곡 불러주니 차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보통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스스로 깨서 활짝 웃어준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울기 시작했다. 선잠을 깨서 그런가 싶어 이리저리 달래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로 집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다시 집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는데 집에서 동생이 엄마를 독차지하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 것일까? 아이는 오로지 어느 한 생각에 꽂혀있는 듯했다.

이런 아이에게 “할머니는 도원이가 가고 싶어 한 곳에 기껏 운전해서 갔는데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집으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당혹스럽고 섭섭하다”는 둥 “그래도 할머니는 도원이를 사랑한다”는 둥 말을 걸었고 급기야는 “할머니를 사랑해? 안 해?”라고 묻기까지 했다. 손주의 답은 “안 해!”였다. 아차! 지금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닌데… 어디서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할 생각이 나왔을까? 지난 삼년여의 밀월 기간이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할머니는 온통 “안 해!”라는 손주의 답에 꽂히더니 이내 손주와의 달콤했던 지난날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아이는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아 보였다. 집이 가까워지니 더욱 여유가 생겼는지 이번에는 바로 할머니 집으로 가서 노래하며 놀자고 했다. 내심 반가우면서도 이미 마음의 상처가 큰 할머니는 아이의 제안에 억지로 웃어주고는 곧바로 아이를 제 엄마 품에 넘겨주고 돌아섰다.

손주의 “안 해!”라는 답이 몇 날 며칠을 어리석은 할머니 머릿속에서 울린다. 할머니는 손주의 “안 해!”라는 답은 “사랑해!”라는 답보다 더 강력한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손주가 반어법을 쓴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기운이 전과 갖지 않아서 손주와 긴 시간을 같이 보내는 일이 어려워졌고 손주도 이제 할머니와 노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찾을 때가 되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도 해본다. 손주가 더 좋은 것을 찾아 간다면 할머니는 박수를 쳐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동안 손주의 언어 습득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느라 나름 애썼고 처음 듣는 어휘의 계열체를 제대로 찾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무채색의 새 스펀지가 무지개 색으로 곱게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얼마나 행복해했던가! 자신의 생각을 가능하면 긴 문장으로 말하려고 애쓰는 손주를 보는 즐거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 뿐인가? 매일같이 할머니를 위해 요리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붙여주는 것이라며 스티커를 할머니 여기저기에 붙여줄 때는 또 어땠던가?

아이와 같이 보낸 행복하다 못해 짜릿한 순간순간을 떠올리다가도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안 해!”라는 두 음절이 또 다시 메아리쳐 울린다. 어리석은 마음작용으로 겪게 된 언짢은 순간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영리한 아이는 할머니한테 떼쓴 일이 잠시 미안하지만 그 당장 자신의 불편함을 호소한 것일 뿐이라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가오는데 어리석은 할머니는 아직도 자꾸만 그 순간을 돌아보고 있다.

모든 존재의 근원, 언어도단의 입정처를 기준하여 판단하고 언행을 바르게 하면 그 어떤 일도 문제가 되지 않으련만…..배운 만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네 살배기 아기 도원이의 할머니 박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