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츠카 아키라] 일본인은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일본인은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 나의 역사 연구의 도달점 –

 

나카츠카 아키라(中塚 明)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學) 명예교수)

 

 

제가 역사 공부를 시작한 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처음부터 연구의 목표를 ‘이것’이라고 정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1945년 8월 15일, 국내외로 역사상 전례없는 참화(慘禍)를 초래하고 끝난 일본의 대패배의 원인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글에서는 “패전 후에 일본인은 패전에 이르는 일본 근대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본인은 패전에 이르는 일본근대사를 어떻게 보아 왔는가?

패전 후에 도죠 히데키(東条英機)를 비롯하여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지도자들의 전쟁 범죄를 밝히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동경재판)이 열렸던 것은 알고 계시지요? 1948년 11월에 그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저명한 작가,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에게 판결 참관기를 의뢰했습니다. 오사라기의 참관기는 《아사히평론(朝日評論)》 1948년 1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400자 원고지로 약 24매에 달하는 장문의 글입니다. 그 중 극히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판은 살아서 미래에 남을 일본인에게 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나라의 과거였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러나 슬프게도 일본 국민은 지금까지 이토록 이면(裏面)까지 파고 들어간 「일본근대사」의 요약을 읽은 적이 없었다. (…)

들으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일본군의 잔학 행위 대목이었다. 이 민족적 오점을 세계의 눈으로부터 씻어 내는데 앞으로 몇 십 년의 세월이 걸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실로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인은 문명인이라고 우쭐해 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왜일까? 어디에서 그런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피가 끓어 오른 걸까? (…)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쉽게 쓰는 소설이 몹시 부끄럽다. 우리가 신뢰해 온 일본 문명의 힘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

재판받은 것은 저 일련의 피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의 과거이자 일본인이라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의 못된 행위였던 것이다. (…)

오사라기 지로는 어떤 사람인가요? 구라마 텐구(鞍馬天狗) 등의 작가로 유명하다고 말해도 지금의 젊은이들은 잘 모르실 겁니다. 잠깐 소개해 드리면,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에 한때 외무성에 근무하였고, 프랑스 문화의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작가가 되었습니다. 일본문학 사전(事典) 등에서는 자유로운 시민적 정신, 지성, 도덕적 청결 등으로 폭넓은 독자를 매료시켰다고 나와 있습니다. 패전 후에는 1960년에 예술원 회원, 1964년에는 문화훈장을 수상했습니다. 만주사변 이후에도 군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패전 당시 일본에서는 최고의 지성을 갖춘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심각한 반성’에 ‘메이지(明治)’는 들어 있었는가?

오사라기 지로는 동경재판의 판결을 듣고 “일본근대사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생각하셨으면 하는 것은, 오사라기가 참관기에서 말하고 있는 ‘일본근대사’에는 ‘메이지(明治)’가 들어 있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오사라기 작품으로 무네카타 자매(宗方姉妹)가 있습니다(1949년, 쇼와 24년 6월 25일부터 12월 31일까지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소설입니다). 조선의 북단, 압록강 하구의 마을, 신의주 강 건너 “만주 지역의 마을 안동(安東. 지금의 단동)”의 부시장(副市長)이었던 무네카타 타다치카(宗方忠親). 패전 후에 고국으로 돌아온 두 딸의 신구(新舊) 세대의 삶의 방식,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노경(老境)의 타다치카의 전후(戰後)를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무네카타 타다치카가 압록강 하구에 대규모 항만도시 건설을 꿈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40년을 만주에서 일하면서 살아왔다. 일대(一代)가 그것으로 끝났다고 해도 될 정도인데, 우리가 힘들여 쌓아 올린 사업이 군인들이 시작한 이 전쟁으로 송두리째 뒤집혀졌다. 일생을 바친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大佛次郎自選集現代小說 5 朝日新聞社, 1968, 64-65쪽). 자신들을 신대륙에 건너가서 아메리카를 건설한 영국인에 빗대고 있는 문장도 있습니다. “만주의 근대적 개발에 헌신해 왔는데 그것을 망가뜨렸다.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의 패배로 끝난 ‘군의 소행’이었다.” 무네카타 자매(宗方姉妹)에 나타난 오사라기의 이러한 생각은 일본 정부의 제2차 세계대전의 총괄과 완전히 판박이입니다.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일본 외교의 과오」(1951년 4월 완성. 2003년 4월부터 공개)라는 기록에서도 ‘과오’는 ‘만주사변 이후’의 일로 되어 있습니다.

오사라기가 동경재판의 판결을 듣고 “이토록 이면(裏面)까지 파고 들어간 「일본근대사」의 요약을 읽은 적이 없었다”라고 썼습니다만, 이때 오사라기의 머릿속에는 메이지의 전쟁, 즉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성공 이야기’로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동경재판에서는 메이지(明治)의 전쟁은 재판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사라기도, 그리고 대다수의 일본인도 쇼와(昭和)의 패전이 메이지(明治)의 전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 전후(戰後)의 일본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메이지의 전쟁’은 조선 침략의 전쟁이었다

‘메이지의 전쟁’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근대사를 보는 것이 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쇼와사(昭和史)(平凡社, 2003. 문고판, 2009)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섬나라 (…) 적국이 공격해 오면 막을 길이 없다. (…)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조선 반도에 일본 군대를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려 하게 된다. 조선 반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육지로 연결된 만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 메이지 40년(1907) 무렵에 만주 경영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그 사이에 있는 조선 반도 – 당시의 이씨 조선은 퇴폐하여 외국 세력이 제멋대로 하는, 정치도 군대도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 에 대한 압박도 강해지고, 마침내 메이지 43년(1910)에 병합해 버리는 강경 수단으로 나온 것입니다. 단, 국제적으로는 인정받고 있었습니다만. (문고판, 9-10쪽)

‘메이지의 영광’을 줄기차게 설파했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도 말했습니다. “이씨 왕조(조선왕조)는 이미 500년이나 지속되어, 그 질서는 노화될 대로 되어서 (…) 한국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능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 라고 – .

전후(戰後) 일본의 문필 업계에서 저명한 이 두 사람의 조선관(朝鮮觀)은 패전 후의 일본, 그리고 현재의 일본인 사이에서도 널리 침투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수천 년의 역사가 있는 나라입니다. ‘코리아’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는 고려왕조(918~) 이후에는 현재의 남북조선의 영역을 차지하는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유럽의 국민국가인 독일이나 프랑스 등보다도 훨씬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그것도 이웃 나라를 통째로 식민지화한 역사는,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 이외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자국을 방어할 힘이 없는 나라가 침략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투는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전후 시기부터 조선 낙오론・정체론 같은 언설이 강화되었습니다. 한도 가즈토시도 시바 료타로도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의 자주, 자립의 싸움과 오늘의 세계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본의 불합리한 침략에 대해 청일전쟁 때부터 일본은 조선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항일 투쟁에 직면했습니다. 청일전쟁은 일본군에 의한 서울의 왕궁, 경복궁 점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폭거에 대해 광범위한 항일 투쟁이 전개됩니다.

봄에 일어난 동학농민의 봉기는 국내의 혹정(酷政)에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한 왕궁 점령에 항의하는 가을부터 이듬해에 걸친 조선 인민의 항일 투쟁은 “목숨을 건 무력 봉기를 지탱하는 지역 농민까지 포함하면 수백만의 일제 봉기”였습니다(井上勝生, 明治日本の植民地, 岩波書店, 2013; 이노우에 가쓰오 저, 동선희 역, 메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 – 홋카이도에서 조선까지, 어문학사, 2014).

오늘날에는 이 조선 인민의 항일 투쟁, 그것을 몰살시킨 일본군의 폭학(暴虐), 포로로 잡은 농민을 논 위에 일렬로 세워 놓고 산 채로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이후의 중일(中日) 전면 전쟁 때에도 중국 각지에서 저질렀던 일본군의 행위가,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다름 아닌 종군 일본군 병사의 기록으로 밝혀졌습니다(「東學党討伐兵士の従軍日誌 「日清交戦従軍日誌」 徳島県阿波郡」,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人文学報 111号, 2018年).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昭和史)에는 중국의 5・4운동(1919년)에 대해서는 4페이지에 걸친 서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5・4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조선의 민족운동 3・1운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 이해와 서술은 일본 정부 관방장관의 칭찬(注)은 받을 수 있어도, 지금과 같은 21세기에는 도저히 통용되지 않겠지요?

注) 가토 가스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2021년 1월 13일의 기자회관에서, 한도 가즈토시의 서거에 대해 “대단히 유감이다. (…) 역사의 탐정(歴史の探偵)이라 자칭하며 쇼와(昭和)의 역사를 검증하여, 일반인들에게 알기 쉬운 형태로 후세에 전달하는데 온 힘을 다하셨다. 자신도 역사에 남을 공적을 남기셨다”고 기렸습니다.

* 나카츠카 아키라 : 1929년 오사카(大阪) 출생.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學) 명예교수. 전공은 일본근대사, 청일전쟁, 한일 관계사.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김승일 옮김 근대 한국과 일본(범우사, 1995),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2002), 성해준 옮김 근대 일본의 조선 인식(청어람미디어, 2005), 이용수 옮김 「건건록」 :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祕錄)(논형, 2021) 등이 있다.

* 출전: 文化センター・アリラン, 《아리랑 アリラン通信》 No. 66, 2021.05.20.

* 번역: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 이 글은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동북아로路 vol.6 (2022년 봄) 24-27쪽에 실린 것을 다시 수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