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문장극장 토토

문장극장 토토

 

 

김형수(작가)

 

1.

<<호남의 극장문화사>>라고 하는 책이 있다. 몇 해 전에 헌책방에서 샀는데, 너무나 재미있었다. 옛날 마당굿이 악극단, 국극단 같은 가설극장의 시대를 거쳐 마침내 근대식 극장에 이르는 과정은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이 소중한 기록이라니! 나는 책장을 넘기며, 내가 태어난 장터 주막 앞을 쓸고 간 각종 유랑 극단의 정체를 거의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게 제일 중요한 극장을 빼먹은 사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호애재라! 이 책은 읍내 군청 앞에 있는 함평극장의 대표자를 면담할 수 없었다는 각주를 달고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저자의 시선에서는 나의 문장극장이 보일 턱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 보탠 글씨 한 톨이라도 고향의 향기가 묻은 게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이 눈물겨운 극장 앞에서 훈련된 것이다. 문장극장은 1960년대의 면 단위 시설로서는 유례없이 세련되고 활기에 넘쳤던 내 영혼의 학교였다.

2.

전라도 함평 문장 장터는 1919년 3.1운동이 끝나고 터가 닦인 곳이다. 그해 ‘4.8 만세운동’ 때 일경에게 쫓겨난 밀래미 장꾼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급조된 장터인데, 함평군의 끄트머리에 있지만 광산군, 장성군, 영광군이 만나는 접점이라 규모가 꽤 컸다. 말하자면 광주에서 영광으로 가는 직행버스가 송정리도 건너뛰지만 이곳에서는 반드시 선다. 그 교통 요지라 할 삼거리 미곡상은 상당한 부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집에 세련된 도회 복장에 사냥개를 끌고 엽총 사냥을 즐기던 장남이 있었는데, 그가 장터 초입에 극장을 지었다. 준공된 해가 아마 1967년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1966년까지도 장터 주막 앞에 가설극장이 섰기 때문이다. 건물 양식은 한적한 신작로 가에 자리한 전형적인 극장식 2층이었는데, 가로수 뒤쪽 공터를 지나 계단을 네 개쯤 오르면 매표구와 출입문이 있고, 그곳을 통과해 관람실 입구까지 소파가 두 개 놓인 휴게 공간이 펼쳐졌다. 그 벽면에 붙은 포스터를 보는 일은 영화를 보는 것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영사실은 화장실 복도 옆 계단으로 올라가는 2층에 있는데 역시 꽤 큰 휴게 공간에 아직 상영되지 않은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깜깜한 관람실은 극장 의자 8석짜리가 두 줄로 15열쯤 대략 240석이 되었을 것 같은데, 공연물이 들어온 날은 매번 손님이 앞뒤 복도까지 빼곡하게 들어차고는 했다.

내가 이 극장을 상세히 기억하는 까닭은 이게 하필 우리 집 뒤뜰 마늘밭 너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 집 마당에서 펼쳐지던 굿판이 모두 이곳으로 옮겨간 뒤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지겹도록 시끄러운 음악이 들렸다. 극장 스피커 소리는 모두 우리 지붕을 넘어서 동네로 퍼져가는 지라 나는 이를 통해 김추자, 정훈희의 노래를 얼마나 들었던지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두 가수의 노래만으로도 몇 시간을 버틸 수 있다. 내가 우리 집을 대포집이 아니라 주막이라 부르는 이유는 술보다도 숙식을 주종으로 했기 때문인데, 바람 같은 쇼단을 따라온 여성 코미디언 백금녀, 이미자의 딸 정재은, 김진규의 딸 김진아 등이 다 우리 큰방에서 묵었다. 행사 때는 그들을 보러 오는 동네 사람들이 귀찮을 지경이었다. 가령 유명 배우 김진규가 <성웅 이순신>을 제작하여 흥행에 실패하고 빚 때문에 시골 극장을 떠돌아다닌다며 동정하는 식이었다.

3.

내가 노천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는 <빨간 마후라>였는데, 신축 극장에서 본 첫 영화가 무엇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자잘한 기억의 파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한 번은 영화 제목이 <울어라 열풍아>였던지, 눈보라가 엄청나게 휘몰아치는 날 여주인공이 보따리를 안고 우는 장면에서 이미자의 목소리로 “울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 하는 구절이 흘러나오자 객석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던 생각이 난다. 또 한 번은 어떤 영화였던지 내가 그걸 보겠다고 한사코 떼를 쓰다가 끝내 입장하지 못한 채 ‘대한뉴스’가 나오자 펑펑 울면서 잠들기도 했다. 하지만 쇼나 가요제 같은 공연물은 반드시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먹고 자는 배우들의 손을 잡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동네에 빵집이 생긴 것도 이 극장의 여파였던 것 같다. 이미 어려서부터 유랑극단이 들어오면 나는 어머니에게 얼마나 귀찮은 짐짝이었는지 모른다. 그 좁은 부엌에서 불을 때랴 반찬을 만들랴 분주하기 그지없는 어머니는 극단이 들어오면 행인들을 시켜서 나를 누나가 공부하는 학교로 보내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누나네 교실 복도에서 끝종이 울기를 기다리고는 했다. 훗날 마흔 살 무렵에 어느 결혼식장에서 누나의 친구를 만났는데, 긴 세월이 흘렀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그 누나가 한없이 반가워했다. “너 내가 업고 다닌 거 생각나냐?” 그 누나와 나의 누나는 시골 장터의 여장부쯤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사내들 틈에 끼어 구슬치기를 하더니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곧장 처녀가 되었다. 그와 관련된 추억인데, 한 번은 아이들이 뿌옇게 김이 서린 빵집 유리창 앞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다 내가 그 틈에 끼었더니 황급히 빵집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형이 나를 불렀다. “야, 너는 들어와서 마음껏 먹어.” 그런 일은 나 같은 누나를 두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다. 누나는 키도 큰 편이고 얼굴도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배우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터를 주름잡던 형들이 누나에게 말을 걸기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하게는 누나가 나를 금덩이를 다루듯이 애지중지하는 까닭이 컸다. 거리에서도 만두를 사주는 사람, 오징어를 사주는 사람, 멀리서 달려와 호의를 베푸는 사람, 다들 이렇게 환심을 사려고 경쟁하느라 난리가 아니었다. 동네에서 주먹깨나 쓰는 형들을 그렇게 만든 누나가 나는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4.

놀라운 것은 한 인간에게 아홉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의 추억이 그다지도 크다는 사실이다. 내가 열 살 때 어머니는 돈 벌러 서울로 가고 집에는 누나가 남아서 나를 챙겼다. 그러다 어떤 날 이웃집 아저씨가 찾아와서 장터의 말썽꾸러기들 속에 여자아이가 끼어 있어서 살펴보니 누나였다는 사실을 고해 바쳤다. 아버지는 전쟁 때 좌우익 싸움에 가족을 잃은 터라 야밤에 돌아다니는 청년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이를 용서할 수 없다고 낫을 들고 찾아 나서는 통에 온 동네가 뒤집힐 상황이 되었다. 누나는 그날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 집 일대는 한동안 얼마나 적막하고 괴괴한 기운에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눈에 띄면 누나가 나타날지 몰라서 되도록 혼자 걷고는 했는데, 어디에서도 그런 기척이 없었다. 그때 바야흐로 문장극장 영사실에서 기사로 일하는 형이 나를 불러서 누나를 찾으러 다니자고 했다. 성실하고 온순하기로 소문난 형인데, 누나를 짝사랑했던가 보았다. 그 형은 틈만 나면 나를 자전거 뒷자리에 실었다. 산골 마을을 돌면서 극장에서 상영할 영화 포스터를 붙이는 일은 그 형이 해야 할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 동네 저 동네, 면 단위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다니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극장에 돌아와 2층 영사실에서 여장을 풀었다.

하여튼 그 무렵 나는 거의 매일 영사실에서 놀다가 나중에는 그 형을 돕는 조수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영화 필름이 담긴 통이 대략 여덟 개쯤 되었던가? 그것을 갈아 끼우거나 필름이 잠시 끊길 때 공백이 찾아오면 객석에서 휘파람을 부는 사람, 고함을 치는 사람,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그 형은 누가 떠들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차분하게 필름을 가위질해서 끼워 넣고 다시 영사기를 돌렸다. 가끔 형이 화장실에 갔을 때 필름이 끊기면 내가 영사기를 지키고 서 있다가 그 흉내를 내고는 했다. 극장 안은 어두워서 다들 영사실 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지만 그 안에 나 같은 꼬마가 앉아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나조차도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문장극장의 ‘토토’였던 것이다.

이 극장은 내가 광주로 나가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폐업하여 엉뚱하게도 교회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그것을 확인한 것이 1977년이었으니 이 위대한 극장은 겨우 10년을 풍미하고 사라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