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낙권] 또, 한 해를 보냅니다

또, 한 해를 보냅니다

 

최낙권 (영화감독, 리얼곤시네마대표)

 

 

강물처럼,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과거 방송 생활을 할 때 노상 영화에의 꿈에 젖어 시간 날 때마다 시나리오를 쓰곤 했던 기억이 난다. 시나리오라고 해 봐야 변변치 않은 것들이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그랬다. 열정도 넘쳐 있었다. 그때 써 놓았던 것 중 2개는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큰 행운이었다. 나머지 것들은 세월 따라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최근, 최근이라 해야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지만, 스스로 혹은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나이의 장벽에 갇혀 꼼짝없는 면벽의 시간을 갖던 중 갑자기 그 벽을 뚫고 나온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다. 초로기 치매에 걸린 며느리와 치매로 오해받는 시어머니를 두고 가족들이 벌이는 가족 내 무관심과 빗나간 확증 편향의 소동을 다소 처연하게 그려 본 가족 코미디다. 처음 제목은 ‘가족사진’이었는데 언젠가 ‘가족 관계 증명’으로 바꿔 놓은 것이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러하다.

대학 1년 때 대학 강사였던 남편과 결혼해 31년째 사는 경희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경희의 꿈은 세 남매를 다 박사 공부시키고 대학교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처럼 결혼을 반대하고 하찮은 며느리라고 구박해 온 시어머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신념을 다져 온 지 오래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자식들은 제각각으로 성장할 뿐 경희의 마음을 알아 따라줄 리 없다. 남편도 남의 편이 된 지 오래다.

그런 경희에게 최근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수시로 기억을 잃거나 이상한 환상에 빠지는가 하면, 시간을 착각한 나머지 수시로 고3 막내딸에게 잠을 못 자게 하고, 싸지 않아도 될 새벽 도시락을 싸느라 꼬박 밤을 새우고는 한다. 자식들은 그런 엄마가 지긋지긋한 나머지 차라리 엄마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럴수록 경희는 약물에 의존해 자신을 이겨 내려 애를 쓴다. 제각각 제 일 챙기기에 급급한 가족들은 그런 경희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저 자식에 대한 집착이 신경 쇠약 수준으로 가고 있다는 정도로 반응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한바탕 소동을 치르듯 남편과 자식들을 내보내고 난 경희가 약을 한 움큼 챙겨 먹다가 시어머니를 보더니 누군데 함부로 남의 집에 와 있느냐며 막무가내 내쫓기 시작한다. 아연실색한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와 막장 몸싸움을 벌이다 경희를 감금해 버리는 사태까지 간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귀가한 가족들을 모아 놓고 시어머니가 자초지종을 늘어놓아 보지만, 가족들은 아무래도 할머니가 이상한 것 같으니 좀 더 지켜보자는 쉬운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렇게 시작된 경희와 시어머니의 동거는 하루하루 남모르는 둘만의 전투장이 되어 간다. 문제는 가족들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던 경희가 시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때만 되면 시어머니를 몰라보고 바람둥이 남편의 여자로 착각하는 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날엔 신발이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등 갈수록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는 한다.

그럴수록 시어머니에 대한 치매 의혹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 가는데, 시어머니는 ‘내가 아니고 네 마누라, 니들 에미가 미쳤다니까’라며 제아무리 설명해 봐도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때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어머니는 왜 자꾸 저를 그런 사람으로 모세요?’라며 훌쩍이는 며느리 때문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되어 간다. 그럴수록 남편과 아이들은 한뜻으로 결론을 내린다. 평소 엄마를 미워하던 할머니가 치매 때문에 며느리를 속박하려고 그런 누명을 씌우는 것이 틀림없다고….

 

 

결국, 가족들은 시어머니를 설득해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진단을 받게 한다. 하지만 의사는 치매까지는 아닌 것 같고 노년에 간헐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심인성 증상일 수 있으니 일단 퇴원을 한 후 시간을 가지고 더 지켜보자 한다. 한편으로 다행이라 안도하며 시어머니를 퇴원시켜야 하는데, 제각각 자기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자 하는 수 없이 경희가 차를 몰고 시어머니를 퇴원시키러 가게 된다. 며느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시어머니인지라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해 보려 하지만, 그때만큼은 너무도 멀쩡하고 태연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경희를 보고는 홀린 듯 차에 올라 동승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얼마간 운전을 해 가던 경희가 조금씩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길을 잃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만다.

그렇게 원치 않게 시작된 여행 아닌 여행으로 시어머니는 경희의 판타지 세계에 빠져들어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데, 급기야는 경희가 닭장차를 들이받는 다중 교통사고까지 내게 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사고는 가족들의 관심이 경희에게로 돌아오는 계기가 된다. 이어 경희가 초로기 치매에 걸렸다는 청천벽력의 진단 결과를 접하게 된다. 충격을 받게 된 경희는 말할 것 없고 가족들은 경희의 치료 방안을 두고 설왕설래하며 몇 날 며칠 극심한 대립을 해 나간다.

결국은 치매 걸린 며느리를 집에 둘 수 없다는 시어머니의 설득에 밀린 남편과 올케가 경희를 요양 병원에 보내고 마는데, 그 사실을 안 막내딸이 울며불며 학업을 작폐하고 나서 경희를 집으로 빼내 오고 만다. 그러자 달래도 안 되고 두들겨 패도 안 되는 자식의 엄마에 대한 정을 어찌 끊을 수 있을까 싶은 시어머니도 결국은 손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데, 웬걸 하루 이틀 지나며 그 모든 일이 시어머니 차지가 되어가고, 시어머니로서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며느리 때문에 겁도 나고 죽을 노릇이 되어 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며느리에게 다가가는 시어머니의 처지를 뒤로하고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전혀 잊고 있었던 이 시나리오를 다시 꺼내 읽고 난 처음 느낌은 조심스러웠다. 역시 소재는 좋지만 에피소드의 기발함과 신선함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눈물이 핑 도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해서 다소 부족함은 있더라도 초로기 치매라는 사회적 관심 촉발이 가능하고, 착한 영화로서 관객층의 외연 확충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독립영화로서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손을 좀 보아 이름난 투자 배급사에도 넣어 보고 영화진흥위원회의 공모에도 출품해 봤지만, 아닌 게 아니라 결과는 뻔했다. 낙담만 더해질 뿐이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추정을 해보자면, 첫째, 시나리오가 밋밋해서 흥미 없다고 느꼈을 가능성, 둘째, 비영화적이라 인식했을 가능성, 셋째, 감독이라는 사람의 이력이 비상업적인 데다가 나이가 많다는 점 등이 두루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런저런 이유로 다시 면벽 수행의 길로 접어들어 몇 달째 더 나은 시나리오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려 전전긍긍하던 차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이 차고 들어왔다. 우리나라 우리 사회, 특히 우리 정치를 여러 경우의 치매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확장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유인즉, 알츠하이머로 대표되는 치매의 증상으로 기억 상실, 인지 장애, 유아적 탐욕 등을 꼽을 수 있는 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보면 치매 형국이나 다름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당일 때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그들이 야당일 때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기억 상실은 기본이고, 안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지 장애 증상은 더욱 심각하며, 너나없이 탐욕의 젖병을 물고서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우국충정을 외치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치매 공화국’ 사람들이었다.

올해는 그런 징후가 더 뚜렷이 나타나 보이는 해기도 했다. 퇴행성 중증 치매에 걸린 당파와 초로기 치매에 걸린 당파가 서로 상대를 치매로 몰아가며 자신은 정상이고 상대가 비정상이라는 인식 투쟁을 끝없이 이어 왔던 것 같다. 차제에 커밍아웃하는 심경으로 고백하자면 나라는 사람은 평생을 여당 내 야당인 사람이고 야당 내 야당인 사람인지라 언제나 반골이고 항시 안티여서 우군을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거나 무조건 반동을 하는 사람은 더욱 아니다. 아나키스트도 아니다. 내 안에는 초지일관해 온 기준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의 근거는 정의와 공정, 도덕과 양심이다. 적어도 사람은 사회는 국가는 그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생각해 왔다. 중요한 건 그 기준을 적용하는 데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춘풍추상(春風秋霜), 무엇보다 친구나 가족은 물론 자신이야말로 예외일 수 없다는 그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우선되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지키고 있다.

적어도 세상은, 그래야 그나마 나은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홉스가 자연 상태 인간의 삶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았다고는 하지만, 이미 자연 상태를 벗어나 자유, 민주, 정의, 평화, 복지 등 수많은 합리적 가치를 기조로 내세우는 발전된 국가가 되어 있음에도 홉스의 관점은 여전히 유효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술(?)프다. 심지어 자기들 입장에 따라 불의를 정의라 뒤집고 편법과 탈법, 초법을 능력으로 일궈 온 사람들을 정치적 팬덤 대상으로 삼아 서로 편을 가르고 자기편 외의 사람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그때나 이제나 세상은 왜 이래야 하냐는 것이다. 힘이 곧 정의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만이 굳건한 생존 지침임을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수시로 손바닥을 뒤집고 내로남불을 일삼는 정치 현실이 그런 세상이 비통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써 놓았던 시나리오 하나가 더 생각난다. ‘요동의 뱀파이어’라는 만화 원작의 시나리오다. 과거 이제까지의 뱀파이어가 피를 구하는 전통 방식의 뱀파이어였다면 현대적으로 진화된 21세기 뱀파이어의 양식은 피보다 돈이라는 설정에 바탕을 두고 써 본 시나리오다. 당시 판권까지 확보해 둔 상태로 애를 써 보았지만, 그저 나 자신 능력의 한계로 아직 어두운 공간 어딘가에 묻혀 있는 상태다. 어쩌다 주인을 잘못 만나 빛을 못 보게 된 그 뱀파이어의 신음조차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미완으로 남아 있는 시나리오가 아직도 몇 개나 더 있다. 미완인 것은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친김에 영화적 상상을 더 해보자면, 미성숙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나의 시나리오들이나 마키아벨리보다 1200년이나 앞서 플라톤이나 공자가 바라고 갈망했던, 아니 석가모니나 예수가 바라던 세상이 아직도 미성숙한 상태로 남아 있는 건 매한가지로 닮아 있어 보인다. 견강부회(牽强附會), 스스로 생각해도 과한 비교이자 억지 비약이지만 영화적 상상이기에 가능한 가설이다. 대체 미완의 세상이나 내 미완의 시나리오들은 어디로 흘러가며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 그 미완의 것들이 또 한 해를 넘겨 보낸다.

 

 

2019.12.31. 최낙권

*사족, 올해는 한국 영화 100주년 기념으로 ‘사사죽죽(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다)’이라는 100초 영화 하나를 만들었고, MBC 아침 드라마 ‘모두 다 쿵따리’에서 마을 노인역을 맡아 생애 첫 연기 경험을 해 보았다. 나름 신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