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을 요구한 투고] 다시 서초동에서

다시 서초동에서

 

익명을 요구한 투고

 

 

12월 7일 토요일 저녁 6시,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 등산용 방석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2백 미터쯤 될까, 언덕 아래로 오늘 집회의 시작점일 무대와 스크린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9월 28일, 참석자가 백만을 넘었다던 날, 발 디딜 틈 없던 그날에 비하면 한참 작아진 모습이다. 그 사이 해도 짧아지고 날씨도 많이 차가워졌다. 두꺼운 외투에 내복까지 갖춰 입었지만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 어렵다. 그럼에도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이 거의 없다. 추위에 어깨는 움츠러들었지만 ‘검찰 개혁’의 목소리는 더 커진 듯하다.

규모는 줄었어도 뜻은 단단

이날 참여자들은 서초역부터 검찰청까지 오름 차도의 반 정도를 바리케이드로 막은 쪽으로 한 열에 7, 8명쯤 앉았다. 중앙 지검 앞 오른편 끝자리에 앉은 내 앞에는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듯한 남자 아이를 동반한 30대 후반의 부부, 그 왼쪽으로 혼자 온 50대 남자, 친구 사이인 듯한 30대 여자 둘이 앉았다. 내 왼편으로 혼자 참석한 50대 여자 한 사람과 또 혼자 온 30대 남자가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나홀로 참여자가 상당히 많다 … 진행자가 이끄는 대로 구호를 외치고 앉았다 일어섰다 노래를 부르면서 두 시간쯤 지내다 보면 혼자 왔는지 친구랑 왔는지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여느 집회와 참여의 형태와 문화가 많이 다른 것 같다. 1980년대 이래 나의 시위 경험에서 말하자면 예전 집회의 참여자들이 보통 대학생 또는 노동조합 회원처럼 동질적이고 참여가 집단적이었는데 서초동 모임은 참여가 개별적이고 참여자의 인구학적 특성도 다양하다. 그래서 구호를 외치며 움켜쥐는 주먹의 높낮이가 일정하지도 않고 노조 집회처럼 일사분란하지도 않다. 하지만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이기에 뜻은 결코 무르지 않아 보인다, ‘검찰 개혁!’

 

 

서로 생각과 희망을 나눈다

집회는 여느 날처럼 1부와 2부로 나눠 한 시간씩 진행됐다. ‘공수처를 설치하라’, ‘계엄 문건 수사하라’, ‘정치 검찰 물러나라’…사회자의 선창을 따라 구호를 외치고 나면 경향 각지에서 온 이들이 무대에 오른다. 3~5분 길이로 집회 참여의 이유를 말하고 구호를 선도하고 내려간다. 때로 노래로 대신하는 사람도 있다. 허례도 허식도 없다, 딱 고갱이만. 이날은 초등학교 남학생, 30대 여자, 40대 남자, 70대 어르신들이 발언했다. 또박또박, 나름대로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달변이 아니지만 말에 조리가 정연하다.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다들 현실을 보는 눈이 날카롭고 생각이 자못 깊다. 새삼 놀라고 감동하게 된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던 게 언제였던가. 생각을 나누는 자리, 이 시간을 보내며 다시 희망을 갖는다. 나 혼자만 아니라는 안도감과 동지애,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나눈다. 함석헌 선생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는데 살 수 있을 것 같다.

 

 

날은 추워도 나누는 온기에 따스하다

얻어가는 것은 위안뿐만이 아니다. 난 이날 나무 조각에 ‘검찰개혁’이라고 새긴 목걸이, 조그만 카스테라 2개, 어묵탕 한 그릇을 공으로 받았다. 조금 부지런을 떨면 카스테라와 어묵탕말고도 받을 수 있는 것이 더 있었다. 지난번에도 노란 색 목걸이, 명함 크기의 대통령 브로마이드를 얻었다. 집회 장소에 들어올 때면 한 면에 팻말이 적혀 있고 다른 면에 공들인 그림이 인쇄된 8절지 크기의 포스터를 받는다. 또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조심스레 선물을 건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머뭇거리며 건네지만 일주일 내내 준비한 작품들이다. 서초역 몇 번 출구 앞, 처럼 장소를 정하고 선물을 예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집회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집회를 기다리며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쿠키를 굽고 공예품을 만들고 선물을 준비한다. 이 집회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고, 이 모임에 나와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래서 뭔가 주고 싶어서이리라. 나도 이 집회에 빠지지 않으려 했지만 이런저런 모임이 있어 두 주를 걸렀다. 참석 못하게 되면 왠지 아쉽고 미안했다. 그리고 얼마나 모였을까 걱정되고 어떻게 끝났을까 궁금했다. 너무 적으면 검찰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뜻이 약한 것으로 비칠까 싶어서이기도 하다. 내 몸을 움직여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두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평소엔 사람 많은 데 가는 걸 꺼리지만 이곳은 예외다. 여기서 만나게 되는 어르신은 반갑고 품위 있어 보이고 젊은이들은 고맙고 기특하다.

 

 

행동하는 시민들과 기다림

서초동 참여자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적극적이다. 집회 장소가 서초동 일원이지만 교대역과 서초역을 오르내리며 바뀌는 터라 매번 정확한 장소를 알려면 인터넷으로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또 지방에서는 며칠 전부터 전세버스를 대절하고 당일 집회 몇 시간 전에 출발하고 자정을 넘겨 귀가하는 수고가 따른다. 집회를 열기 위해 대형 스크린, 마이크 시설 등에 필요한 적잖은 돈도 이들의 십시일반으로 충당된다. 주최 측에서 얼마만큼의 비용이 들지 관계된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리면 사람들이 만 원, 이만 원씩 보낸다. 참석 못하는 게 미안해서, 또 집회를 마련해 주어 고맙다는 마음으로 후원한다. 정산 뒤 남은 돈은 되돌려 준다. 안내, 안전 등 집회 동안 필요한 손길은 자원봉사로 채운다. 자원봉사 공지가 뜨면 이내 마감된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어묵탕 코너가 마련되었다. 거길 지나며 저걸 먹으면 속이 따뜻하겠다 싶었지만 굳이 줄을 서진 않았다. 더 필요한 사람들이 있겠지, 라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고. 그런데 오늘은 자원봉사자가 앉아있는 자리에까지 탕을 배달해(?)주었다. 천인 분의 탕을 준비했는데 기온이 내려간 것을 고려해 누군가 추가로 3백인 분을 후원했다고 한다. 서로를 배려해 어묵탕이 남을 지경이라고, 먹어 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했다. 추가된 3백인 분은 미처 끓이지도 못해 재료 상태로 나눠줬다고 한다.

 

 

이날 무대에 오른 30대의 남자가 “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 조직에 충성한다고 말한 현 총장을 멋있게 봤던 것을 늦었지만 후회한다”며 충성의 대상은 조직이 아니라 국민이어야 한다고 말해 갈채를 받았다. 수사도 기소도 제 잣대로 제 마음대로 하고, 정치까지 좌지우지하려는 검찰은 이미 선을 넘었고 자정의 의지나 능력은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언제가부터 ‘검찰 개혁’ 못지않게 ‘검찰 해체’가 서초동 집회가 주된 구호가 되었다. 무소불위 검찰을 잡을 수 있는 건 국민뿐이지 싶다. 그렇지만 진정한 무소불위 국민의 힘이 등장하기까지는 응축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까지 등산용 방석과 엘이디 촛불을 상비품으로 문간에 두고 토요일 집회를 일상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행동하는 양심 깨시민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