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호] 옛 화가의 발길 따라 / 임진강의 가을-삭녕 우화정

옛 화가의 발길 따라 / 임진강의 가을-삭녕 우화정

 

 

이태호(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다산 숲 아카데미 원장)

 

조선 후기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은 1797년 임진강 상류인 경기도 삭녕 <우화정(羽化亭)>을 거쳐 황해도 토산 <삼성대(三聖臺)>에서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두 명승고적은 38선 바로 북쪽에 있어 현지를 가볼 수 없는 형편이다. 이들과 연계되는 임진강 지점이 연천(漣川)이며, 남북 강변 풍광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이 ‘태풍전망대’이다. 나는 2010년 겨울, 2011년 여름과 가을에 이곳을 댕겨 왔다. 그때를 추억하며, 가을 경치를 그려보았다. 임진강의 굽이와 주변 산언덕과 들판 풍경은 그야말로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천혜의 자연이었다. 분단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우리 국토의 어느 곳보다 감명 깊은 아름다운 경치였다. (도 1) 저 멀리 강줄기가 희미해진 곳, 직선거리 정북에 삭녕 우화정이 있을 법하다.

 

 

내가 이곳을 찾았던 이유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우화정 그림 현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2011년 11월 동산방 갤러리에서 가졌던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전시를 기획하며, 새로이 정선의 우화정 그림이 포함된 1742년 작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 발굴되어 현지를 답사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이태호, 「겸재 정선, 가을 임진강을 그리다-1742년 작 《연강임술첩》 신화첩본에 대하여」, 이태호 편, 『조선 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 2011.)

《연강임술첩》은 영조 18년(1742) 10월 보름날, 임술년을 맞아 경기도관찰사 홍경보(洪景輔, 1692~1744)가 경기 동부지역을 순시하던 중에 삭녕(朔寧) 우화정으로 관내 최고의 시인 연천현감 신유한(申維翰, 1681~1752)과 최고의 화가 양천현령 정선을 불러들여 달빛 뱃놀이를 즐겼다. 세 사람이 삭녕에서 연천까지 정자가 설치된 배(樓船)를 타고 술과 시와 음악을 나눈 이 모임은 660년 전 소동파(蘇東坡)의 고사(故事)를 추종한 행사이다. (같은 임술년(1082) 소동파는 7월과 10월 만월(滿月)에 호북성 황강(黃岡)에서 객(客)과 선유(船遊)했고, 이를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로 남겼다.)

정선은 이 이벤트를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 두 점으로 나누어 그렸다. 그림의 제목대로 삭녕 우화정에서 세 사람이 만나 ‘배를 타고’(登船) 출발하는 장면과 주민들이 횟불 들고 마중 나온 웅연에 도착해 달빛 아래 ‘닻줄을 매고’(繫纜) 나루에 정박하는 장면을 각각 담은 것이다. 여기에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글 ‘의적벽부(擬赤壁賦)’ 일부, 그리고 ‘3첩을 그려 3인이 각각 한 권씩 나누어 가졌다’라는 정선의 발문(跋文)을 합하여 꾸민 서화첩이 《연강임술첩》이다. 3첩 가운데 기존에 알려진 《연강임술첩》(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에 이어 두 번째 본이 출현한 것이다.

《연강임술첩》의 〈우화등선〉(도 2)과 〈웅연계람〉 두 폭은 실경산수화이면서, 동시에 경기도관찰사 일행의 뱃놀이를 담은 기록화이다. 옆으로 긴 화면에 너른 풍광을 적절히 소화한 대가다운 구성방식을 보여준다. 고운 비단에 비교적 강한 먹을 쓰고 옅은 담채와 먹의 농담으로 스산한 늦가을의 정취가 살짝 감돌게 그렸다.

 

 

이 작업에는 조선 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중국의 옛 문인 · 성현의 고사를 떠올리거나, 중국 문사들의 시의(詩意)나 행적을 빗대 조선 땅에서 풍류를 찾아 나선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정선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킨 이념과 예술정신의 한 갈래이다. (이태호, 「새로 공개된 겸재 정선의 1742년작 <연강임술첩>」-소동파 적벽부의 조선적 형상화, 『동양미술사학』 2, 동양미술사학회, 2013.)

정선의 진경산수화 작품은 거의 풍경의 외모를 닮게 사생하지 않은 관행을 보인다. 그런 탓에 강변의 절벽과 암봉(岩峯)들을 강조한 〈우화등선〉의 경치 분위기를 정수영의 <우화정>(도 3) 그림에서 찾았다. 정선과 정수영의 우화정 그림을 비교하면 완연히 다르다. 겸재의 〈우화등선〉에는 절벽과 축대의 높은 언덕에 우화정이 있는 반면에, 정수영의 〈우화정〉에서는 강가의 낮은 언덕에 정자가 보인다. 그리고 〈우화등선〉의 울룩불룩 솟은 토산 봉우리들도 정수영 그림의 풍광과 크게 다른데, 이는 역시 정선다운 과장법이다.

 

 

정수영의 〈우화정도〉(도 3)는 “삭령 우화정은 현에서 동쪽 4리에 있다(朔寧 羽化亭 在縣東四里)”라고 그림 제목을 지리정보와 겸해서 쓰고, 그 왼편으로 강 풍경을 옆으로 길게 그려 넣은 그림이다. 화면 왼편에 우화정과 마을이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강변 언덕과 벼랑이 그려져 있다. 산언덕에는 굴곡마다 바위와 수목들이 정수영 특유의 둥그스런 성근 수묵 필치로 그려져 있다. 근경에 임진강의 본류가 흐르고, 우화정을 끼고 긴 모래톱이 있고, 그 위 마을로 흐르는 샛강 지류는 마곡천이다. 팔작지붕 측면 두 칸 정자 아래 강가에는 갓을 쓴 두 인물이 탄 배가 지난다. 정수영과 함께한 인물은 삭녕현에 근무하거나 주변에 사는 문인 친구로 보인다. 이때 삭령군수는 정수영과 교분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1796년(병진) 12월에 부임한 최중규(崔重圭)였다.

이 〈우화정도〉를 실경 그림으로 짐작해 정선의 〈우화등선〉과 비교했으나, 그동안 연재에서 확인했듯이 정수영도 사생 능력이 크게 미흡했으니 앞선 내 비교의 글은 오류가 된 셈이다. 또 《연강임술첩》의 또 한 그림 〈웅연계람〉도 화면의 중앙 나루의 솟은 벼랑과 주변 강마을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웅연으로 확인되는 장소보다 징파나루로 추정하였다. 현지답사 때 징파나루 왼편 암벽 이름이 부엉이바위라는 것을 확인하고, 정수영 《한·임강명승도권》의 〈휴류암도〉로 착각하기도 했다.

 

소동파를 기리는 조선의 문인문화, 우화정

현종 8년(1669) 이산뢰(李山賚)가 군수 시절에 지었다는 삭녕 우화정(羽化亭)은 그 명칭부터 소동파를 기린다. ‘전적벽부’에서 따온 ‘우화등선(羽化登仙)’, 곧 날개는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고 싶던 소동파의 소망인 셈이다. 임진강 본류인 대수원(大水源)과 소수원(小水源)인 마곡천의 합류 지점에 조성한 우화정은 서울을 내왕하는 교통요지에 최고의 풍류 공간으로 꼽힌다. 조선 후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즐겼던 절경인 듯한데, 현지 풍경을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19세기 전반 《광여도첩》의 <삭령군지도>(규장각 소장)를 보면, 우화정은 읍치 관아의 동남쪽 ‘성산(城山)’ 아래 양천 합류 지점에 표시되어 있다. (도 4) 이곳에는 본디 삭녕의 옛 관아인 고읍(古邑)이 있었고, 지명이 대사리(大寺里)인 점으로 미루어 상당한 고을이 조성되었던 장소였던 것 같다. ‘한절골’이라 불려왔으니 큰 사찰이 있었던 모양인즉, 조사되지 않았다. 정수영의 <우화정> 그림에 우화정 정자를 비롯해 마을 표현에 고읍의 옛 정취가 어려 있는 듯하다.

 

 

이외에도 임진강(臨津江)은 강변 주상절리 벼랑들을 ‘적벽(赤壁)’이라 불렀을 만큼, 소동파를 기리는 유적지로 정착되었다. (『임진강』, 경기도박물관, 2009. ; 황헌만의 사진기행, 『임진강』, 역사만들기, 2011.) 연천(漣川)의 징파(澄波) 나루도 소동파의 산동(山東) 지역 봉래십대선경(蓬萊十代仙景) 중 하나인 ‘만리징파(萬里澄波)’에서 연유하며, 임진강(臨津江)의 이름도 황주 남당(南塘)의 ‘임고정(臨皐亭)’에서 따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임진강을 몽땅 소동파의 영토로 삼은 셈이다. 조선 문인들의 소동파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엿보게 한다.

임진강을 명소로 만든 사람은 남인계의 영수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이다. 연천 왕징 강서리에 허미수의 은거당(隱居堂) 터와 묘소가 있다. 우화정을 세운 이산뢰 군수도 허미수의 각별한 제자이다. 허목은 연천에 기거하며 임진강 곳곳을 탐승하고 기행시문으로 남겼다. (이종묵, 「징파강의 여윈 선비, 허목」, 『조선의 문화공간』3, 휴머니스트, 2006.) 그 이후 시문(詩文)으로 이곳을 빛낸 연천현감 신유한 또한 남인으로 허미수 사숙했던 인사이다. 경기도관찰사 홍경보 역시 남인계이다.

남인계의 다산 정약용도 1794년 10월에 경기 암행어사로 연천과 삭녕 우화정을 들렀을 때, 허미수를 추모하며 시문으로 남기기도 했다. <등우화정(登羽化亭)>(丁若鏞, 與猶堂全集 1集 2卷)이란 5언시를 보면, 절경 풍치를 읊으며 궁핍한 지역민의 수심을 강조한 점은 다산답다.

碧澗銜沙觜  푸른 시내 모래톱 싸고도는 곳

紅亭枕石頭  단청한 정자 돌머리 위에 서 있네

聊因王賀職  암행어사의 직책 수행하러 왔으나

兼作謝公游  사령운의 산수 유람도 겸하고 있네

小雪依山屋  흰 눈은 산골 집 지붕에 남아 있는데

孤煙下峽舟  쓸쓸한 연기 속에 배를 타고 내려오나니

窮閭有愁歎  가난한 시골 마을에 수심이 서려

不敢戀淹留  더 오래 머물 생각나지를 않네

이 시 번역은 윤인현, 「다산의 한시에 나타난 선비정신과 자연관」( 『다산학』19, 2011.)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정수영보다 3년 앞서 정약용이 ‘우화정에 올라’ 쓴 시여서 더욱 정수영 <우화정> 그림과 연관을 짓게 한다. 시의 앞 구절 ‘푸른 양 갈래 시내 사이의 모래톱’은 정수영 그림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림으로 확인되지 않는 암반에 누운 우화정을 ‘홍정(紅亭)’이라 표현해, 단청이 치장된 정자로 유추하게 해준다.

정수영은 우화정을 떠나 그림의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상류인 토산(兔山)으로 이동해 삼성대에 올랐다. 여기서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의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 연재(이태호 교수의 답사와 스케치 여정 28- 삭녕 우화정/조선 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생 여정을 따라, 열다섯 번째)에서 옮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