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 이과적 노년

이과적 노년

 

이정화 (수필가)

 

 

내 몸에는 수(數)가 산다.

그것을 새삼 깨달은 때는 변질된 나의 디스크가 통증으로 존재 증명을 해댄 뒤였다.

나는 내 안에 있었으나 잊었던 내 척추에 아침마다 출석부를 부른다. 아직은 건재한 목 관절의 1, 2, 3번과 손상된 4, 5번을 짚어보고 심각한 허리의 4, 5, 6번 디스크를 쓸어준다. 무엇에 그토록 조아리고 살았던지, 앞으로 굽은 뼈대와 뒤틀어진 골반을 재확인한다. 관절은 머릿속 그 어떤 기억들보다, 지나온 시간의 영광과 불운을 뚜렷이 새기고 있다.

그걸 확인할 때의 기분은 날마다 틀리다. 뼈마디가 아픈 날에는 복병을 발견한 듯이 씁쓸하고, 조금 개운한 날에는 그저 안쓰럽다. 무수한 전장의 상흔을 안은 패잔병을 바라보는 부대장의 마음이 이와 같을지 모른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내 몸에 이렇게 많은 수가 존재하는지 몰랐다. 내가 줄을 세운 적도 없건만, 척추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것도… 이미 몸의 곳곳에 세려면 셀 수 있는 기관들이 하나, 둘 혹은 다섯 개씩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손가락을 접으며 더하기를 배울 때 이후론 별다른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화가 시작되고 곳곳에서 고장 신호가 울린 요즘에서야, 나는 내 몸의 수에 집중한다. 그리고 나는 그저 몸집이나 영혼이 아닌 과학이고 수였던 것을 깨닫는다.

 

이전까지의 나는, 열렬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늘 몸의 신호보단 감정의 흐름에 따랐다. 다분히 내키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았다. 그러고 나선, 그 일에 따른 결과에 희비를 반복했으니 어쩌면 내 삶의 방식은 책을 읽고 자신만의 독후감과 반응을 허용하는 천상 ‘문과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요즘 노년의 진로를 ‘이과적’으로 바꾸려 한다. 부쩍 몸의 숫자와 친해진 것처럼 삶의 비율을 계산한다. 새로 산수 공부를 하듯이…

가장 연습하는 문제는, 마음을 줄이는 것이다. 가족은 물론 모든 관계에 기대를 버려 그에 따를 상처도 줄이려 한다. 관심과 간섭, 자율과 태만 등 비율의 과소에 따라 달라질 그 모든 경계를 생각해 본다. 그럴 땐 노련한 재단사처럼 마음도 행동도 적절히 가르고 싶다.

노년에는 늘리는 것보단 줄이고 버리라는 것이 많다. 식사량도 줄이고 체지방도 덜어 내고… 욕심도 버리고 근심도 버리고… 말도 줄이고 짐도 줄이고…

키우고 더하여 부피와 규모를 늘리던 젊은 시절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고 보면 노년 수학의 특징은 자신을 가볍게 하는 뺄셈이다.

학창 시절, 단순한 산수가 수학으로 넘어가던 즈음에 가장 놀라웠던 수학 규칙은 마이너스 마이너스는 플러스가 된다는 것이었다. 현실에선, 적자가 쌓여 흑자가 되는 일은 없었으니 도저히 맞지않던 셈법.

그러나 노년엔 그것도 몸소 체험하게 될 듯하다. 비우고 줄이면 몸과 마음에 이롭고, 덜어 내고 베풀면 주변이 넉넉해질 테니… 또, 기대를 줄여 실망이 덜하면 오히려 평안해지니 정말로 마이너스에 마이너스가 거듭하여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다. 악기 자체의 울림이 감동적이던 그 소리는 1735년에 제작된 과르네리였다. 문득, 나무는 세월과 함께 가치를 더해 명기가 되는데 사람은 고작 몇 십 년도 존엄성을 유지 못하는 것이 씁쓸했다. 단풍이 꽃같이 고운 것도, 세월이 흘러내린 때문인데…

 

 

살아오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쉽진 않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이과적으로 바꾸어 보려고 한다. 지혜로운 뺄셈으로 나를 가볍게 하고싶다.

이만큼 내려놓는데 육십 해가 들었다. 많이 바라지 않고 오래 낙담하지 않으며 적으나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는데 이만큼 걸렸다. 괜히 먹은 나이가 아니다. 사소하나마 참으로 대견하고 기특한 나의 세월, 나의 이과적 노년, 이만하면 됐다. 인생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