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시무(時務)의 역사’

‹주간금요일(週刊金曜日)› 1334호. 2021.06.25.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시무(時務)의 역사’

– 재일사학(在日史學)의 개척자 강덕상 선생을 그리워하며 –

 

신창우(愼蒼宇)  (호세대학(法政大學) 교원, 문화센터 아리랑 부관장 )

 

 

2021년 6월 12일, 강덕상(姜德相) 선생이 서거하셨다. 89세였다(한국 나이로는 90세).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되지만, 재일(在日) 조선인 역사연구자의 후배로서, 그리고 선생이 창설하신 ‘문화센터 아리랑’의 부관장으로서, 강덕상 선생의 지금까지의 너무나 큰 역사 연구의 족적에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강덕상 선생은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의 재일교포 1세이다(2살 때에 일본에 옴). 선생이 1950년대 말부터 미야타 세츠코(宮田節子) 씨나 카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씨 등과 조선사 연구를 시작한 지 벌써 60년 이상이 지났다. 그 사이에 강덕상 선생의 연구는 다양하게 진행되었는데, 특히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조선독립운동, 전쟁 시기 조선인 학도병 출진, 메이지 이래의 일본의 조선관 같은 연구는 하나같이 강덕상 선생의 이름이 맨 먼저 떠오른다. 나아가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같은 연구소와 자료관, 시가현립대학(滋賀縣立大學)의 박경식문고(朴慶植文庫) 설립에도 힘을 쏟으셨다.

강덕상 선생은 ‘재일사학(在日史學)’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재일사학’은 박경식(朴慶植)씨, 강재언(姜在彦)씨, 박종근(朴宗根)씨, 그리고 강덕상 선생 등의 제1세대에 의해 구축되었다. 일본 근대사에는 조선이 ‘부재’하고, 한국 역사학은 일본 사료의 분석이 약하다. ‘재일사학’은 양자의 맹점을 지적하고, 사료 발굴을 통해서 길 없는 길을 새롭게 개척하였다.

박경식씨는 강덕상 선생에게 조선인 강제 연행의 역사를 이 시대의 역사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 ‘시무(時務)의 역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덕상 선생에게 있어서 ‘시무의 역사’는 실로 관동대지진 시기의 조선인 학살이었다. 선생이 정리한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의 <현대사자료 6>(現代史資料6)은 조선인 학살의 실태 규명이 비약적으로 진전되는 선구(先驅)가 된 자료집이다. 나아가서 강덕상 선생은 관동대지진 시기에 내려진 계엄령이 조선인에 대한 근거 없는 적시(敵視)이자 선전 포고로, 갑오농민전쟁, 의병 전쟁, 삼일독립운동, 간도 학살이라고 하는, 일본에 의한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가혹한 군사 폭력, 즉 식민지 지배의 연장선상으로 위치지웠다. 조선인 학살은 공포에 의해 생긴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일본이 관민일체(官民一體)가 되어 오랫동안 조선인을 박해한 결과 생긴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민족 고난에 대한 깊은 시선

“일본의 전환점에는 반드시 조선이 있다.” 일본 근대사를 보면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은 분명하다. 현재에도 일본의 우경화가 지적되는 가운데, 재일조선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는 갈수록 격렬해지고, 관동대지진 등에 관한 역사 개찬(改竄)이 정치가나 미디어에서 횡행하고 있다. 강덕상 선생이 제기해 온 일본에 대한 물음은 지극히 무겁다.

또한 강덕상 선생의 역사학에는 자신의 황국소년(皇國少年) 경험과, 민족을 잃은 고통에서 오는 조선 민족의 고난에 대한 깊은 시선이 있다. <조선인학도출진>(朝鮮人學徒出陣, 1997)은 전쟁 시기의 강제적인 조선인 학도 동원 정책과, 그 와중에 일어난 조선인 학생들의 생사를 건 투쟁을 멋지게 부각시킨 명작이다. 뿐만 아니라 ‘통사(痛史)’로서의 독립운동사와, 남북 분단의 극복과 통일에 대한 생각도 컸다. <여운형 평전(1-4)>은 조선독립운동의 기둥이었던 여운형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식민지 시기부터 행방 이후에 걸친 조선 민족의 고난에 가득 찬 ‘광복사’를 그려냈다. 조선의 통일을 위해서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여운형의 역사적 평가가 남북 모두에서 공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덕상 선생의 연구에 대한 열의를 지탱하고 있었다. 실로 일생 동안 현역이었다(<여운형 평전 4 – 일제말기 암흑 시대의 등불로서>는 2019년에 간행됨).

나는 강덕상 선생의 <조선인학도출진>에 감명을 받고 편지를 보내, 동경의 요요기(代々木)에 있는 산수루(山水樓)에서 16년 전에 처음으로 만났다. 선생은 모자를 쓰고 서민적인 복장이었다. 이후로 강덕상 선생과 아리랑에서 연구회를 만들고, 그 이외에도 많은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농밀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최근에는 악성 림프종 투병으로 많이 괴로워하셨는데, 여전히 역사를 이야기하시는 열정은 건재하였다. 적어도 관동대지진 100년이 되는 2023년까지는 함께 하고 싶었다. 강덕상 선생님, 부디 편히 쉬십시오.

번역 :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